윤상원 열사가 이렇게 생겼구나. 처음 알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단정한 표정. 그 동안 상상해 온 윤상원과 사뭇 달랐다. 아니,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오월의 광주. 시멘트 열기 위에 피어난 아지랑이 헤치며 아이스크림 입에 물고 왁자지껄하게 걸었던 금남로. 그 날의 총성을 그대로 간직한 나무 앞에서 시민군 대변인이자 민주항쟁의 지도부로서 전남도청에 남아 죽음을 기다린 한 사람, 윤상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시민, 운동가, 대학생 등이 모여 함께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 영혼 결혼식의 주인공. 그 후 해마다 오월이면 망월동 묘역과 금남로 일대를 비슷한 경로로 걸어 다녔고 해를 거듭할수록 참여자 아닌 안내자 역할을 하느라 사색할 겨를이 없었다. 윤상원을 다시 생각하게 된 때는 최근이다. 어둠 속에서 계엄군을 기다렸던 당시 그의 나이, 서른 한 살. 그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윤상원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1980년 광주 현장에 있었던 한 외신기자는 당시의 윤상원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의 행동에는,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무장 동료들의 허둥거림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침착함이 있었다. 그 침착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가 죽고 말 것이라는 예감을 뚜렷하게 받았다. 그의 눈길은 부드러웠으나 운명에 대한 체념과 결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그렇다. 사람의 눈은 언제나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정영창 초대전<한 사람>의 각 작품 앞에서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다.

무형의 생각 그 자체가 예술이 되는 시대, 디지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파, 정보의 범람, 속도의 경쟁이 반복되는 일상을 등 뒤에 두고 캔버스를 마주한 한 화가. 붓이 캔버스 위를 지나갈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크게 들린다. 정적을 깨는 유일한 소리. 화폭을 어떻게 채울지 구상하는 시간부터 캔버스의 질감을 만들고 그 것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내기까지. 그 시간의 겹은 언제나 정직하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의 시간과 노동, 그 정성이 만들어낸 특별한 정서를 마주하는 시간의 가치를 각자의 삶과 연결해 나가는 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정영창의 그림은 참 곱다. 복제된 이미지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검정. 검정이 이렇게 풍부한 색이었던가. 손이 닿으면 그게 몇 번이라도 끝없이 묻어날 것처럼 깊고 짙다. 작가는 광택이 없는 이 특별한 빛깔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가지 실험을 거쳤다. 먹과 아크릴. 이 단순함만 남기까지 고요한 작업실에서의 치열한 붓질은 수 천, 수 만 번 반복되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표현법을 체득한 한 화가와 그가 화폭에 담은 한 사람. 한 번에, 한 사람. 그가 천착하고 있는 작업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속도와 무관하다.다작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이다.(정현종의 시 ‘방문객’) 나희덕 시인의 평론 제목 「검은 빛의 환대」는 이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말하고 있다. 더 이상의 구구절절한 설명이 머쓱해 진다.

예술공간 이아(이하 이아)는 옛 제주대학교병원 건물을 개축공사하여 만들어졌다. 이아 터는 근⋅현대100년 간 제주사람들의 건강을 돌보고 죽음을 지켜보았던 의료 중심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정치⋅행정의 중심지로서 삶을 살피는 기능을 하고자 했다. 옛 건물 구조와 벽을 보존한 채로 리모델링된 이아는 이제 예술로 그 역할을 이어가고자 한다. 지하에 만들어진160여평 갤러리에 정영창의 작품40여점이 자기 자리를 찾아 균형을 만들어냈다. 삶과 죽음, 존재와 생명을 다루는 정영창 초대전<한 사람>이 이아 터를 거쳐간 수많은 죽음까지 호명하여 위로하는 중이다.거시적으로 역사 속 민중들은 모두가 국가라는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피해자이지만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각자의 일상 속 타인에 대한 가해와 타인에 의한 피해는 하루하루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의 삶이다. 인권과 진보, 사회의 변화는 결국 한 사람의 삶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죽음으로 가는 여정, 그 삶의 과정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8월15일까지 열리는 정영창 초대전<한 사람>을 통해 역사 속 한 사람, 주변의 한 사람 더불어 ‘나’라는 한 사람에 대해 깊게 사색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박민희의 기고로 제주아트저널 널른팡5호에 수록된 “정영창 초대전 한사람”

덧붙이는 글 | 제주도립미술관 소식지 널른팡 5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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