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현기영 작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국가와 폭력 그리고 문학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는 백발노인의 선명한 눈빛. 당시 나는 ‘저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생각했다. 그의 글을 읽은 적 없고, 제주4.3(이하 4.3)을 알지 못했을 때였다. 그리고 작년 ‘잃어버린 마을1)’의 한 폐교에서 다시금 그 눈빛을 만났다. 제주4.3미술제(이하 4.3미술제) 워크숍에서 처음 마주한 강요배 작가였다.

소설 <순이 삼촌>의 현기영과 그림 <동백꽃 지다>의 강요배는 분단과 독재,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제주사회가 배출한 우리시대의 지성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뒷골목에서 몰래 써야했던 1970년대. 육지와 단절된 섬의 악몽, 그 날의 기억을 문학으로 세상에 폭로했던 소설가 현기영. 그는 창작의 고통, 그 대가로 또 다른 신체적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다. 1992년, 강요배의 <제주민중항쟁사>전시에서 발표된 50점의 작품들. 제주현대사는 구체적인 한 장면, 한 장면으로 묘사되어 수 만 명의 관객을 만났다2). 한 날 제사지내는 일이 많은 마을들. 해가 지면 작은 목소리로 주고받던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이 사회에 널리 알려진 계기였다. 그림을 보는 찰나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가.

‘그림’을 보다

1976년 24세 청년 강요배의 첫 개인전이 제주에서 있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80여점의 작품을 통해 그의 어린 시절까지 평생을 환기하는 대규모 기획전 <시간 속을 부는 바람>이 진행 중이다. 먼저 접해 온 그의 역사화와는 또 다른 깨달음이 스친다.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 아, 이것이 그림이구나! 붓이 지나간 자리, 겹겹이 쌓아올린 물감들. 한 발 물러서면 보인다. 파도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 발끝까지 환하게 비춰주는 달빛… 툭툭 무심코 찍힌 듯 보이는 붓 자욱이 이토록 아름다운 야생화로 보이는 신비. 그렇지, 자연에는 외곽이 선명한 것이 없다. 멈춰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한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가만히 멈춰있고 단순화된 색들은 오롯이 기계가 토해낸 인공뿐이다. 고성능 카메라로 절대 담을 수 없는 풍경, 한 가지 계통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색. 움직이는 그림. 참 사실적이다. 작가는 ‘그림’만의 고유한 영역에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작업실에 침잠해 있었던 것일까. 수십 년 간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 그림 그리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색을 했을까.

나는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그림 그리기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절대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늘 조급했다. 코끝 찡하게 만드는 한 문장, 몸을 들썩이게 하는 노랫가락, 눈물 펑펑 쏟게 하는 영화관의 두 시간을 대체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이 존재할 수 있는지가 항상 의문이었다. 아마도 그림다운 그림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것이리라. 또 정말 그리고 싶은 것이 없었던 것이리라. 사진을 보고 확대 묘사하는 교육을 받았던 이들에게 그림이란 언제나 사진보다 못한 것이었기에. 

몸속이 텅 비어 ‘종’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댕- 댕-’ 마음의 울림을 느끼며 전시를 관람했다. 그림을 보는 찰나의 코끝 찡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겹겹이 쌓인 물감들이 만들어낸 서걱서걱한 질감. 비가 왔는지 습기를 머금고 짙어진 하늘. 돌풍에 높아진 파도와 바위에 부서지고 흩뿌려지는 물방울들이 어둡다. 작품들은 묵묵히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작가가 애정하고 그려내는 이 섬이 어떤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강요배와 ‘4.3미술’

앞서 언급한 강요배의 <제주민중항쟁사>전시는 1994년 탐라미술인협의회(현재는 탐라미술인협회, 약칭 탐미협)창립과 함께 탐미협 주최로 1회 4.3미술제가 개최되는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전시의 성황은 도민들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예술로 함께 치유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어읽기 🚪 http://www.vop.co.kr/A00001020025.html

덧붙이는 글 | 인터넷언론 VOP [박민희의 미술이야기]로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본문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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