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시각화한 ‘꽃할머니’, 사계절, 2010, 13-14p ⓒ권윤덕 제공

그림 한 장의 증언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꽃할머니>(사계절, 2010년)의 일곱 번째 장면. <꽃할머니>는 총 열 아홉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그 중 기록화로서 가치가 높은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을 사용했다. 위안소 운영체계가 한 눈에 들어오는 탁월한 선택이다. 압축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이 그림 한 장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대마다 설치되었던 위안소가 얼마나 짜임새 있고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첨예하고 중요한 쟁점이다. 

일본군 위안소는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군인들의 “사기진작”이라는 명목으로 설치되었고 일본 제국주의 식민국이었던 조선과 타이완의 많은 여성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곳이다. 1996년 UN인권위원회에 제출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이를 명확하게 ‘전시 하 군대 성노예제’로 규정했다.1) 이것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사적인 영역에서 계약으로 이루어진 매춘이나, 자발적인 희생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음에 대한 국제사회 인식의 합의를 보여준다.

일본정부가 직접 운영했던 ‘위안부 제도’ 피해여성의 수는 연구자에 따라 최소 이만 명에서 최대 사십만 명으로 추측되는2) 20세기 최대의 전시 잔혹행위 중 하나이며, 명백한 전쟁범죄다. 하지만 관련 증거자료가 많지 않다. 일본 패전 이후 위안소의 여성들은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하거나 귀향할 수 없는 타국 현지에 버려졌고, 관련 자료들은 의도적으로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1991년 8월 14일. 해방이후 사십 육년간 피해자 여성들의 가슴 속 피멍으로만 존재했던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실체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다. 1990년 6월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일본정부의 공식발표는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을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 1988년부터 수면 위로 드러난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연구와 여성인권 운동은 피해당사자가 합류하며 힘을 키워갔고, 1992년 1월 일본대사관 앞에서 정기수요시위를 시작한다.

1990년 삼십 육 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공식 발족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꾸준히 요구해온 사항은 여섯 개다. 하나, 일본정부의 전쟁범죄 사실 인정. 둘, 공식 사죄. 셋, 진상규명. 넷, 희생자 추모비 건립. 다섯, 생존자와 유족에게 법적 피해 배상. 여섯, 역사교육. 하지만 지금까지 이 중 단 한 개도 수용되지 않았으며 박근혜정부의 2015년 12월 28일 한․일 협상을 통해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가 새해를 준비하는 국민들에게 안겨 준 한․일 협상을 ‘굴욕’이라고 단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 측은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협상문 발췌)”로 규정하고 있는데, 일본정부가 아닌 군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이다. 더욱이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하기로(협상문 발췌)”하는 조항은 국가차원의 법적 피해 배상이 아닌 민간의 활동을 일본정부가 지원하겠다는 맥락인데, 한마디로 기만이다. 더욱이 앞의 조항들을 통해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협상문 발췌)”을 강요하고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에 박근혜정부가 동의한 것이다.



이어읽기 🚪 http://www.vop.co.kr/A00000983221.html

덧붙이는 글 | 인터넷언론 VOP [박민희의 미술이야기]로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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