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무딘 연장을 불에 달구고 두드려서 날카롭게 만든다는 뜻을 가진 순수우리말 ‘벼리다’는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아서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뜻을 되새길수록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을 찾기가 어렵다. 기억을 벼리다. 이 한 문장을 통해 제주도민의 70년 세월, 뇌리에 남은 기억, 삶을 향한 의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올 해 전시감독을 맡아 기획 및 추진을 총괄하고 있는 안혜경 아트스페이스⋅씨 대표는 자카리아 모하메드(팔레스타인)의 시 “재갈”에서 영감을 얻어 25회 4⋅3미술제의 제목을 “기억을 벼리다(Forged into Collective Memory)”로 정했다. “차가운 쇠로부터 벼리어진 한 조각 기억의 재갈”이라는 싯구가 가슴 깊이 와닿은 것이다. ‘4⋅370주년 2018 제주 방문의 해’로 많은 이목을 끌고 있어 더욱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게 된 25회 4⋅3 미술제<기억을 벼리다>는4⋅3의 현재적 해석에 관심을 기울인다. 최근 세계적 사회문제로 떠오른 ‘난민’, ‘여성’ 등 소수자들에 대한 이슈와 ‘이주’, ‘노동’, ‘환경’ 등 우리 삶에 밀접한 이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안혜경 전시감독이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은 70년 전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피어오른 4⋅3의 횃불이 부정부패 청산을 요구하며 타오른 광장의 촛불로 재점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레드아일랜드의 수많은 무덤 앞에서 벼려내야할 기억은 ‘약자의 억울함’ 보다는 ‘민중들의 의로움’이 아닐까?

4⋅3을 기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기 위해 노력해 온 문화예술인들의 움직임이25년간 해를 거르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1994년 탐라미술인협회(이하 탐미협)의 창립과 동시에 회원들을 주축으로 개최되어 온 4⋅3 미술제는 최근 21회부터 외부 감독 제도를 도입하여 탐미협 회원 뿐만 아니라 국내외로 참여 작가의 폭을 확장해 규모있는 연대 기획 전시로 발전하고 있다. 

4⋅3 미술제가 지난 24년 간 지켜온 중요한 기풍 중 하나는 전시 관계자들이 함께 4⋅3 유적지를 답사한다는 것인데, 올 해에도 어김없이 지켜졌다. 1월 6일 진행된 첫번째 답사는 사려니숲길에 위치한 ‘이덕구산전’과 제주시내. 옛 사진 뭉치를 손에 들고 제주시내 도보 투어를 하며 시간 여행을 했다. 같은 달 21일 진행된 두번째 유적답사는 서귀포시 남원읍에서 시작한 비석 투어. 현의합장묘와 송령이골 무장대 무덤, 안덕면 동광리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과 충혼묘지 등을 답사하며 4⋅3을 기억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더불어 22일에는 김종민 4⋅3전문가를 모셔 강의를 듣고 함께 토론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통의 시공간에 ‘서로 존재’하는 체험, 몸의 기억은 4⋅3 미술제가 지속될 수 있는 중요한 매개라고 생각된다. 참여작가 워크숍은 ‘배움’에 대한 겸손한 태도, 보이지 않는 정서적 연대감 등을 깨닫게 해준다. 때로는 현장에서 깨워진 오감이, 함께 나누는 대화가 홀로 습득하는 지식보다 직관적으로 본질 앞에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올 해 전시 참여작가는 강동균, 강문석, 고경일, 고경화, 고길천, 고승욱, 고혁진, 김수범, 김영화, 김영훈, 김옥선, 노순택, 박경훈, 박소연, 박진희, 서성봉, 송동효, 송맹석, 신소연, 신예선, 양동규, 양미경, 양천우, 연미, 오석훈, 오현림, 이경재, 이승수, 이종후, 이준규, 이지유, 임흥순, 정용성, 정현영, 홍덕표, 홍보람, 홍진숙, Guston Sondin-Kung 거스톤 손딩 퀑(미국), Jane Jin Kaisen 제인 진 카이젠(덴마크), Kip Kania 킵 카니아(미국)총 37팀 40명으로 장르는 회화, 판화, 설치,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구성된다. 4월3일부터29일까지예술공간이아갤러리와아트스페이스⋅씨에서 진행되며 관람 가능 시간은 오전 10시 부터 오후 6시까지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고 관람료는 없다.

2018년 제주시청 월간지 3월호 전시 소개를 위한 글과 사진을 기고했다.

덧붙이는 글 | 제주시청 월간지 <열린제주시> 2018년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위 캡션 링크를 클릭하시면 E-BOOK으로 연결됩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