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박불똥의 작품 “불한당不汗黨(포토몽타주, 360x280mm)”과 나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한옥과는 이질적인 콜라병이 유난히 크다. 한자직역 ‘땀이 없는 무리’, 남의 것을 마구 빼앗는 파렴치한으로 읽히는 불한당은 누구일까? 30년 전 30대였던 작가는 ‘콜라’라는 상징을 통해 불한당, 미국의 제국주의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잡지나 신문 등에서 발췌된 것으로 추측되는 여러 가지 사진들을 기초재료로 제작된 동갑내기 작품을 마주하며, 우리가 함께 태어난 1980년대를 상상해본다. 

광주. 1980년대는 5월 18일 전라도 광주에서 시작되었다. 금남로에서 울린 총탄 소리가 돌고 돌아, 온 국민의 함성이 되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시체 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이 ‘의문사’1)로 사라져 갔던 나라. 1987년 6월의 함성, 6월의 국민들은 학살을 지시했던 독재자를 해고하고 대통령 직선제 시대를 열었다. 당시 미국 문화원은 대학생들의 점거와 방화가 끊이지 않았다.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을 받아 광주를 피로 물들인 공수부대가 주한미군의 최종승인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갤러리175에서 진행 중인 전시 <박불똥, 1985-2016>에서 미국 그리고 공권력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이유다.

고유명사 ‘민중미술’

그의 작품은 1980년대를 동행했던 세대에게 너무나 쉽고 통쾌한 직설화법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세대에게는 어떨까? 85년생인 내가 80년대의 작품을 보며 그 속에 담긴 상징들을 한 눈에 읽을 수 있기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영상, 강의, 토론, 사회과학서적, 문학, 역사기행, 유적답사 등의 목록과 그 내용을 정리하는 일이 가능할까? 고유명사로서 ‘민중미술’은 딱 그만큼의 지나간 역사의 무게,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방대함, 접근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청년세대가 ‘의문사’의 공포를 모른다고 해서 ‘민중미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삶을 성찰하고 사회를 통찰하는 미술 중 민중미술 아닌 것이 없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서울바벨>에 전시된 수많은 도전들, 청년들의 아우성은 민중미술이 아닌가? 일상 속에서 삶의 변화를 꿈꾸는 ‘커뮤니티 아트’와 ‘공공미술’은, 텀블벅에 공지되어 8,652명의 후원으로 제작될 3D 프린트 ‘작은 소녀상’3)은, 스스로 노란리본을 만들어 다는 작은 실천은, 평범한 다수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은, 왜, 민중미술이 아닌가? 인터넷과 스마트폰 혁명이 만들어낸 다양한 방법의 민중미술이 동시대의 화법으로 여전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왜, ‘민중미술’은 1980년대에 갇혀버린 걸까.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기성의 미술을 벗어나고자 했던 수많은 실험, 역동적인 미술운동을 모두 담기에 고유명사 ‘민중미술’은 너무 단편적이다. 이대범 미술평론가는 “‘포스트 민중미술’ 무엇에 대한 ‘포스트’인가”4)에서 1980년대의 다양한 미술운동이 모두 ‘민중미술’로 호명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 그는 이 현상의 원인을 당시 정부의 문화예술운동 규제 정책에서 찾는다. 정부에 귀속된 언론과 일부 평론가들의 협업으로 당시의 ‘새로운 미술운동’은 모두 ‘민중미술’로 축소 귀결되어 공식화 되었고, 1980년대 다양한 미술운동들은 ‘민중미술’ 한 단어로 납작해졌다. 

‘민중미술’이라는 말을 1980년대의 것만이 아닌 현재진행 중인 ‘한국현대미술사’의 일부로서 사용할 순 없을까? 혹은 1980년대의 입체적인 미술운동을 ‘민중미술’로 뭉뚱그려 부르지 않을 수 없을까?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질문을 허공에 던져본다.



이어읽기 🚪 http://www.vop.co.kr/A00001007230.html

덧붙이는 글 | 인터넷언론 VOP [박민희의 미술이야기]로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본문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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