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4월의 타임라인에 접속했다. ‘이것은 학살이다’라고 적혀있다. 당시의 감정이 상기되어 열이 오른다.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 지난 해, 4월이 오기 전 두 가지 사건에 골몰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세계 최초 우주 생방송이 진행되었던 것이고, 두 번째는 3D프린터 기술의 빠른 발전 속도에 대한 관심이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삶의 질적 향상은 스마트폰이 그러했듯, ‘혁명’이라는 단어로 설명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주의 경이로운 풍경과 3D프린터의 섬세함은 묻고 있었다. 예술은 무엇인가?

4월
4·16 그 날의 목격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최첨단 과학기술을 누리고 있는, 불가능은 없을 것 같은 시대에 고작 30m 물 밑 304명의 존엄은, 304개의 세계는 구조되지 못했다. 구조할 수 있었던 그 사람들은 우리의 미래가 수장된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고, 실종자 가족 옆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벚꽃과 목련,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아름다운 풍경마저 애처로운 4월이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시시각각 뉴스를 확인하고 저녁마다 소주잔에 눈물을 담아 마시며 분개했던 나날들. 목적 없이 쏟아낸 타임라인의 성토들. 우리의 상처는 얼마나 치유되었을까. 여전히 유가족들은 아이의 영정사진을 가슴에 품고 거리를 헤매며 일 년 전 그 날을 살고 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상주는 없고 조문객들은 헌화도 하지 못한 채 물벼락을 맞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304명의 죽음, 안전점검이 되지 않은 오래된 배가 침몰한 사고이기만 했던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기도 하지 않은가. 선체가 전복되기 전까지 가만히 있었던 통한의 102분, 두려운 것이 너무 많았던 악취 나는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계산을 하고 있었나. 진실은 반드시 인양되어야 한다. 팽목항에 걸린 현수막이 가슴에 사무친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봄이 사라진 4월. 제주 4·3을 마주하고 앉아 생각한다. 67년 전 그 날. 그 날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던 것일까. 평생 가장 강렬했을 잔상, 죽음의 공포. 침묵할 수밖에 없는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된 폭력에 대해 유족과 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55년만의 일이었다. 제주 4·3이 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임을 정부가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4·3은 금기의 영역이다. 자유롭게 ‘말’하기 불편한 2015년, 섬나라 대한민국. 제주에 ‘바람, 돌, 여자’가 많은 이유와 제주도민들의 억척같은 생활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된 ‘이제사 말햄수다’4.3증언 자료집 제목, 제주4.3연구소, 1989년, ‘살암시믄 살아진다’소설 「순이 삼촌」의 한 대목, 현기영, 1979년, ‘가매기 모른 식게’‘까마귀도 모르는 제사’라는 뜻으로 제사를 하면 당연히 까마귀는 알게 되는 법이니, 까마귀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지내는 제사라는 말이다. 제사는 후손이 맡아 지내기 마련인데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영혼에 대한 제사라고 해서 아예 지내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를 테면 후사 없이 죽은 친정오라버니에 대한 제사를 누이로서 그냥 넘길 수 없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조용히 맡아 지내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와 같은 문장들이 뇌리에 박혀 가슴을 울린다.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도 과거사라 멀게 느끼며 살았는데 1948년 제주의 이야기가 현재사라고 인식되는 순간순간의 소름이 필자를 여전히 4월 제주도에 머물게 한다.

어머니
산 사람 반, 귀신 반 뒤엉켜 살았다는 제주. 어머니는 몸이 아플 때마다 어머니의 어머니 손에 끌려 무당집에 가 굿을 했다. 기가 약한 사람들은 무덤가나 집터만 남은 곳에는 아예 데려가질 않았고, 곧잘 신이 들리곤 했다고. 추자도가 고향인 외할머니는 제주도 이모의 중매로 할아버지를 만나 네 아들과 두 딸을 낳고 평생을 제주에서 사셨다. 외할아버지는 몸에 총상이 있으셨다. 돌아가시기 전 어느 기자의 도움을 받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고, 돌아가신 뒤 충혼묘지에 묻히셨다.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제주가 외가인 나는 어린 시절 함덕 해수욕장과 삼양 앞바다로, 도깨비 도로며 한라산, 우도까지 잘도 누비고 다녔다. 새로 생긴 드라마 촬영지와 수많은 테마 공원, 박물관까지……. 관광지로 내로라하는 곳은 다 가 본 것 같다. 제주도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뒤 역사책 몇 권 읽고 알게 된 한 줄, 제주 4·3항쟁. 이에 대해 처음 질문했을 때 친척들의 어색한 침묵이 아직도 낯설게 기억된다. 최근 방문했던 강정마을의 차가운 공기가 떠오른다. 물 맑은 ‘일강정’과 ‘평화’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 색안경으로 이간질 하는 국가. 피해자와 가해자, 반대파와 찬성파로 분리되어 버린 마을. 그로 인한 공동체의 파괴는 마을사람들이 평생 몰라도 될 경계의 눈빛을 가르쳐 준 듯했다. 나는 이렇게 31년 만에 처음으로 검붉은 제주를 알게 되었다.

수집 ; Archive
미술제 준비를 위해 제주도에 2차 방문한 날짜는 2월 14일이었다. 김종길 예술감독, 이정주 큐레이터, 김수범 운영위원장… 만나는 분들과 수줍은 초콜릿과 함께 반가움을 나눴다. 1차 워크숍으로 방문했던 큰 넓궤 영화 “지슬” 촬영지. 동광목장 안에 있는 용암동굴로 1948년 11월 중순 이후 동광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이다. 큰 넓궤는 험한 대신 넓어서 이 후 이 굴로 찾아든 사람은 120명이나 되었다. 동광리의 신원숙(1933년생) 씨는 당시 생활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밥은 큰 넓궤에서 하지 않았어요. 근처에 작은 굴들이 많았는데 주로 거기서 며칠에 한 번씩 해서 차롱에 담았다 먹었어요. 또 물은 삼밭구석의 소 먹이는 물을 항아리로 길어다 먹었어요. 밖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딛고 다니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가 발 디뎠던 곳에 꽂아 발각되지 않게 했죠. 똥도 밖에서 누지 못했어요. 굴 한 쪽을 변소로 정해서 그 곳에 변을 보도록 했지요.…” 안의 서늘함과 단단함 그리고 깨진 항아리의 잔상. 오감이 기억하는 동광리 4·3유적지 현장을 가슴 한 편에 품고 대면한 제주도립미술관의 반듯한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1박 2일 동안 미술관 답사, 운영위원회의 참석, 기획회의 등 여러 종류의 일정이 알차게 진행되었다. 그 마지막 일정은 ‘각출판사’에서 진행되었는데, 4·3에 대한 무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바심이 책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져 두 어깨와 양손가득 책 짐을 짊어지고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3월, 우체국으로부터 매일같이 4·3미술제의 역사와 22회 참여 작가 분들의 역사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작은 작업실에 홀로 앉아 처음 읽기 시작한 책은 ‘다랑쉬 굴의 슬픈 노래’4.3길 찾기1, 사진/김기삼 글/김동만, (사)제주민예총 4.3문화예술제 사업단 엮음, 도서출판 각, 2002년. 다랑쉬 굴은 음지에서 회자되던 4·3학살의 실상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난 최초의 4·3유적지이다. 1991년 12월 22일, 굴 안의 공기는 44년 만에 환기되었다. 침묵 속에 누워있던 유골 위에 삭은 허리띠가 그대로 얹혀있다. ‘곧 나가서 농사짓자’하며 버틴 날들이 얼마나 지났을까? 1948년 12월 18일, 토벌대 제 9연대는 수류탄 등을 굴 안으로 던져 피난민들이 밖으로 나올 것을 유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굴 입구에 불을 피웠다. 굴 안에 있던 20여 명의 마을사람들은 땅에 코를 파묻거나 돌 틈에 머리를 묻고, 질식사했다. 당시 토벌대의 만행을 목격하고 시간이 지난 후 현장에 다시 찾아가서 시신을 나란히 수습해놓았던 채정옥(1923년생)님의 증언으로 44년 만에 굴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강태용(남, 34세), 박봉관(남, 27세), 고순환(남, 27세), 고순경(남, 25세), 고태원(남, 25세), 고두만(남, 21세), 함명립(남, 21세), 김진생(여, 51세), 부성만(여, 24세), 이재수(남, 9세) 등의 희생자 명단이 정리되었다. 그들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4·3 50주기에 맞춰 발간된 책, 4·3미술제 5년을 돌아보는 내용의 「역사에 던진 아픔의 꽃묶음」은 1900년대 4·3미술 태동에 대한 자료 중에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4·3미술제를 주도해 왔던 선배 예술가들의 감정과 기운을 짐작할 수 있는 귀한 자료였다. 책의 후반부에 첨부된 ‘4·3의 총체적 이해에 대한 예술적 시도 이목’, ‘4·3미술제 관람객 호응 속 연장전시’, ‘강요배 제주민중항쟁사 그림전 폭발적 관람객 동원 – 전례 없는 인파에 화랑측도 놀라움’과 같은 제목의 정성껏 스캔한 기사들을 볼 때에는 덩달아 신이 났다. 사람들은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잊고 싶어도 잊혀 지지 않았을 참혹한 역사의 잔상을 되새김질하며 그 긴 세월을 얼마나 고독하게 견뎌왔을까. 답답한 숨통을 트이게 했던 탐라미술인협회(이하 탐미협)의 용기가 고마웠다. 

4·3미술제에 대한 많은 글들은 故김현돈 미술평론가의 몫이었다. 애정으로 뭉친 그의 예민한 평론들을 통해 4·3미술제 20년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점, 나아가야 할 방향 등 큰 흐름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김현돈 선생의 귀천 이후 쓰인 4·3미술제 20주년 기념전 서문 ‘샤먼의 눈으로 ; 사내 둘의 갑오년 잡담’, ‘기억투쟁과 4·3미술 ; 4·3미술의 상징과 그 의미’ 등을 통해 김종길 예술감독이 지난 세월 4·3미술과 접신하여 앓아온 신열과 황홀 그리고 20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제주 곳곳을 찾아 헤매며 4·3에 대한 후체험과 그 체험에 따른 리얼리티 미학을 창조해 왔던 ‘4·3예술심방’4·3 미술제 준비기간 ‘샤먼(shaman)’이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사용되는 것을 보았는데, 대화 중이었던 음악가 최상돈 선배에게 우리말로 풀이하면 어떤 단어가 적절한지 물었더니 ‘심방’이라는 답을 주었다. ‘신의 신부름을 하는 이’, ‘신령을 붙잡는 이’ 등의 뜻으로 추측되는 ‘신방(神房)’이라는 단어가 자음동화로 인해 ‘심방’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무속적 사제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우리의 미술사를 이야기하는 일이니 만큼 적절한 우리말로 풀이하고 싶었다. 필자는 ‘샤먼 리얼리즘’의 개념을 김종길 미술평론가로부터 처음 접했다.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우리 고유의 정서와 시각으로 예술을 분석하고 표현하는 흐름이 현대 예술계 한 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일제와 분단 을 겪으면서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긍정과 자부심보다는 서구에 대한 열패감에 젖어 있는 사회를 환기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큰 설득력과 호응을 얻고 있다. 특정 종교적 성격을 갖는다기 보다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는 행위 ; 제사와 굿 등의 제의를 통해 산 사람들을 위로했던 우리 문화를 재조명하고,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샤먼’에 비유하는 견해에 깊게 공감한다. 고 김현돈 미술평론가는 일찍이 4·3 미술제의 성격을 전시의 형태로 치러지는 ‘제의’로 해석했고 해 마다 제사를 지내듯 4·3 미술제를 준비하는 탐미협의 예술가들을 ‘샤먼’이라 불렀다. 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역사적 책무를 떠안고 심방의 삶을 자처한 예술가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미술평론에 대한 철학도 추측할 수 있었다. 믿기 어려운 학살의 역사와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수많은 선배 예술가들의 투쟁의 발자취 따라 시공간을 오가며 어지럽게 쫓다보면 명치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어느새 얼굴이 발개지고 숨이 찼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문을 달칵 열고 들어와 물어봐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왜 혼자서 울고 있니?”

책을 덮고 숨을 고를 때면 울음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이 뜨거운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 고향 제주, 그 섬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물었던 강요배 작가의 그림과 살암시믄 살아졌던 사람들의 증언에서, ‘(곱창구이집) 아주머니가 왜 (제주에서) 일본으로 흘러들어왔을까? … 나는 4·3을 알지 못한다’ 자성하는 서경식 교수의 글에서 유난히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살고자 몸부림쳤던 생명들에 대한 연민인가. ‘가매기 모른 식게’를 지내며 숨죽여 살아온 유가족에 대한 위로인가. 목숨부지 위해 권력에 아첨했던 어리석음에 대한 한탄인가. 가난한 생명을 버러지만치 취급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분노인가. 세상이 강요하는 망각에 맞서 열병을 앓으며 기억투쟁을 지켜 온 순수에 대한 동경인가. 가슴을 두드리는 이 뜨거운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67년 전 죽어간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일들이 지금의 우리와 무슨 관계일까. ‘우리’는 무엇이기에 지난 과거에 현재를 이입하게 만들고 이토록 강하고 끈질긴 동질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일까. ‘고향’은 무엇이기에 생사의 기로에 내몰렸던 세상의 모든 불쌍한 자들의 염원인 것일까. 제주 4·3 그리고 4·3미술제의 역사를 쫓기에 한 달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제주도 민중미술의 태동
올해로 22회 째인 ‘4·3 미술제’가 개최될 수 있었던 배경에 ‘바람코지’와 탐미협이 있다. 1984년 2월에 김재경, 문행섭, 박경훈 3인의 작품으로 개최된 제1회 <상황과 표현>전은 시대와 현실을 화폭에 담고자 했던 제주 현실주의 미학의 첫 씨알이었다. 1985년 박경훈, 문행섭의 같은 과 후배인 강태봉, 김수범, 부양식, 양은주 등과 ‘바람’ 판화 동인이 결성되면서 민중미술의 기초조직이 탄생했고, 1988년 ‘그림패 바람코지’가 결성하기에 이른다.미술평론가 김유정, 『제주 민중미술의 태동과 4.3미술제의 전개 – 초기 탐미협 활동을 중심으로』, 탐라미술인협회 창립 20주년 기념전 제주미술 맑은바람 ISLAND 도록, 2013년, 57쪽 1992년, 바람코지 회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그려졌던 4·3의 미학적 결실은 <제주민중항쟁사 – 강요배의 역사그림>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1994년 드디어 탐미협이 창립되었다. 미술의 진정성 회복, 삶과 밀착된 리얼리즘 미술창작, 민주적 화단 분위기의 창출과 비평적 미술풍토의 확립, 자기정체성을 갖는 제주지역미술의 위상과 역할 창출. 이 네 가지의 취지로 “현실의 잘못된 상태를 차례로 폐기해 나가기 위해 진솔하게 탐구하고 행동하는 예술의 실천적인 현실운동”미술평론가 김유정, 『진솔하게 탐구하고 행동하는 예술을 향하여 – 맑은 바람전에 부쳐』. 탐라미술인협회 창립전 제주미술 맑은바람 도록, 1994년, 17쪽이 시작된 것이다. 창립과 동시에 탐미협은 ‘4·3 미술제’를 개최하며 본격적으로 4·3미술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시작되는 미학적 실천
“4·3미술제의 중요한 특징은 과정지향형 작품창작에 있다. 해마다 진행된 작가들의 4·3유적지 현장답사와 답사를 통한 새로운 작업계획의 수립은 그간 4·3미술제가 대부분 신작으로 구성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이다. 왜 신작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4·3미술이 ‘기억투쟁’의 언어여야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4·3미술은 그런 기억투쟁을 중심에 두고 첫째 살림의 복권, 둘째 산 역사의 생명운동, 셋째 상상연대의 실천행동, 넷째 후체험적 현장인식, 다섯째 리얼리즘 미술언어라는 다섯 개의 특징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의 복권이 4·3의 슬픈 영혼들을 위한 미학적 씻김굿이라면, 산 역사의 생명운동은 삶의 현장에서의 역사회복이다. 상상연대의 실천행동은 육지와 아시아로 번져나가는 4·3미술의 지속적인 확장선이며, 후 체험적 현장인식은 4·3의 역사를 공유하는 ‘지금 여기’의 인식이다. 또한 리얼리즘 미술언어는 4·3미술이 기억투쟁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미학적 기준일 수 있다.”미술평론가(22회 4.3미술제 예술감독) 김종길, 22회 4.3미술제 아카이브 전시 현장 안내 글, 전시기획안 중 발췌

향후 4·3미술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 회 새로운 작업계획의 시작점이었던 4·3유적지 답사의 정보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1994년 3월 15일, 16일 양일간 진행된 1회 4·3유적 답사지는 이덕구 산전과 낙선동 4·3성터, 송악산, 동광리 굴 탐사, 원동마을 등이었고 탐미협의 전회원이 참석했다. 2회 유적답사는 1995년 4월 9일에 진행되었고, 오림반 유격대 훈련장과 영남마을, 녹하지 주둔소를 탐방했다. 탐미협 회원 및 참여 작가 등 30여명이 함께했다. 3회 유적답사는 1996년 2월 25일 진행되었고, 우천관계로 아끈 다랑쉬 오름을 전회원이 참석하여 탐방했다. 4회 유적답사는 1997년 4월 6일 도내 4·3유적지에서 진행되었고, 5회 유적답사는 1998년 4월 9일 동광리 유적지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1회부터 5회까지의 탐미협 활동에 대한 자료는 비교적 정확하고 풍부한 편이다. 1996년 발행된, 탐미협이 엮은 「제주미술」 두 권의 잡지와 위에서 언급한 「역사에 던진 아픔의 꽃묶음」에 그 내용이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년 21회에 2014년 1월 25일, 26일 양일간 21회 미술제 참여작가 32명이 참여한 가운데 4·3평화기념관과 이덕구 산전, 가오리 오름을 1차 답사한 후 강연회가 진행되었고, 2월 22일과 23일 양일간 북촌기행 및 너븐숭이 4·3기념관, 그리고 다랑쉬 굴과 용눈이 오름, 의귀리 속냉이골, 낙선동을 2차 방문했다. 참가자는 27명이었다. 2013년 20회에는 오키나와를 탐방했다. 이 외에 해마다 어떤 유적지를 방문했는지, 누가 참여했는지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었으나 정보수합과 검토에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다. 지난 20여 년간 답사한 지역의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면 반복적으로 방문한 지역과 그 곳의 특성, 당시의 사회적 정황 등을 분석하여 4·3미술제의 가치지향과 매 회 작품창작의 과정, 그리고 유적지 현장과 작품과의 관계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탐미협의 시대정신은 육지와의 교류전 경향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99년 처음으로 시작된 제주·충북 미술교류전은 작년까지(9회) 지속되었는데 “언제부턴가 열린 하늘 길로 인하여 한 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이 좋은 시절에 우리가 나누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2002년 충북-제주미술교류전 「바람 땅, 구름 뫼」 서문 중 질문과 함께 서로의 삶과 예술을 성찰하는 장이었다. 1950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1980년 광주에서 우리네 아픈 역사를 공감하는 또 다른 예술심방들과의 만남이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탐미협의 작가들은 많은 시간을 강정마을에서 보낸다. 당대의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점철되어 있는 현장들은 작가들로 하여금 언제나 새로운 조형언어를 독려하고 있다. 

(중간생략: 본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는 회차별 전시개요, 참여작가 등의 내용중복)

마치며
탐미협이 창립한 1994년에 나는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10살 때였다. 이후 10년 동안 미술을 배우고, 성인이 된 후 10년 간 문화·예술계에 종사했지만 서른 즈음에야 뒤늦게 의문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왜 서양예술사만 배울까? 이 화두를 가슴에 품고서야 비로소 다시 ‘미술’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예술이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의 출처가 파악되지 않은 자부심과 희열을 기억한다. 올 봄, ‘4·3미술’이라는 한국현대미술사의 한 복판에 동참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했다. ‘4·3미술’과 인연을 만들어주신 김종길 예술감독님 고맙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자료수집에 도움을 주신 김수범, 박경훈, 양천우, 홍덕표, 홍진숙 작가님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22회 4.3미술제 <얼음의 투명한 눈물> 도록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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